I watched old boy of which original film is a Korean motion picture with same title. Frankly saying, I prefer this version than the original, on contrast to many others. Of course, the Korean version has much more tension and uniqueness of story. However, the original sympathizes with the main male character while its remake version doesn't. In particular, the original version gives religion-based view and irony to the society but the latter gives multiple ethnographic views. In the latter, Joseph was imprisoned for 20 years. However, the actual surveillants are a number of eyes with non-Anglo-Saxons (especially, the blacks). Actually, the film foregrounds the carnival-like sphere of colored races – Though Asia is used only functionally. Therefore, the film accentuates competition between the colored race and the Protestant.

스파이크 리의 올드보이를 봤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스파이크 리의 올드보이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물론, 긴장과 스토리, 샷의 유니크함은 한국판이 낫다. 스파이크 리는 스토리 라인과 캐릭터를 조금 바꾸어놓긴 했지만, 변형된 캐릭터와 스토리, 반전이 한국판을 본 관객이라면 예상 가능하다는 점에서 그닥 새롭지 않다. 일명 장도리 씬이라 불리는 장면도 수평 운동에서 수직 운동으로 푼 것 외에 샷 자체의 특별함은 없다. 그러나 한국판이 주인공 오대수에게 찌질한 부성 캐릭터를 부여하고, 그가 속죄해야 하는 대상이 조금은 황당한 이유였다면, 미국판 주인공 조셉은 앵글로섹슨계 백인 남성 오피스워커라는 위치를 부여받았고 그가 속죄해야 하는 대상은 (여전히 모호하긴 하지만) 좀 더 그럴듯한 이유를 준다. 특히 내가 미국판에서 관심 있는 부분은 영화가 펼치는 다인종적, 카니발적 긴장이 감도는 공간들이다. 그가 감금된 방은 검은 피부를 가진 네 개의 눈으로부터 감시를 당한다. 하나는 벽에 걸려진 하얀 요리사복장을 한 흑인 남자의 사진이고, 다른 하나는 스크린을 통해 이 방을 감시하는 흑인 남자에 의해서이다. 방에 걸린 사진 속 남자는 여러 번 강조되는데, 사진 속 남자는 상당히 매력적으로 보일 뿐 아니라, 심지어 이 남자는 조셉의 착란 속에서 조셉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그는 이 눈들에 의한 감시에서 히스테릭한 상태로 빠져든다. 그리고 유지태가 한국에서 했던 역할은 라틴계통의 남자로 보인다. 조셉이 술에 취해 길을 헤매는 장면과 감금된 장소를 찾아 헤매는 장소는 차이나타운이다 - 물론 영화에서 아시아는 기능적으로 사용되긴 하지만. 이처럼 다양한 인종적 재현 공간에 감독은 이 백인 남자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카니발적 욕망 (한국에서는 근친상간으로 표시되었던)을 제시한다. 한국판 영화 결말과 다른 미국판 영화의 결말은 그래서 자연스러워 보인다. 물론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다. 하지만 그 실패의 이유가 정말 미지근함 때문인지, 혹은 영화가 주는 불편함 때문인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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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Diary 2013. 10. 29. 07:10

무도. 정형돈이 노래를 듣다가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보고 있던 유희열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시간. 내 손아귀에 있었던 그 시간들이 모래알처럼 사르르 빠져나가버렸다. 그래서 나도 따라 울었다.

공간. 당신들이 낮을 살아가는 동안 나는 밤을 산다. 죽어라고 뛰어봤자 소용없다. 닿지 않는다.

어제, 한동안 잊고 있던 Lou Reed의 타계 소식을 들었다. 언제였던가, 그의 노래를 들으며 가슴 속 후끈 달아오르는 감정을 부여잡던 날들. 불현듯 한강에 가고 싶었다. 그 바람 속, 갈대숲 옆을 달리던 그 밤.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지금 소진해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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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랑시에르에게 브르디외와 같은 반미학을 외치는 구조주의자들은 오히려 민주주의에 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 같다. 그는 프랑스 혁명 당시 집을 짓는 노동자가 "as if" 라고 생각했던 데서부터 미학을 가져온다. 미학은 인식론이다. 모든 지식은 미학적이다. 미학이란 예술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consensus이고 합의이나 새로운 스타일의 등장은 예술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논의를 가져온다. 따라서 그것은 정치적이다.

고로 새로운 스타일의 등장, 미학을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의 문제는 정치적 급진성을 담지한다.

parrhesia01_ranciere.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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